라스베이거스의 한 창고 문에는 공룡이 책을 움켜쥔 로고가 붙어 있다. 그 안에서 Amazon 직원들은 희귀 고서의 등을 잘라내고 페이지를 한 장씩 스캔한다. 스캔이 끝난 책은 폐기된다.
이 장면은 AI 학습 데이터 전쟁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상징한다. 단순한 저작권 분쟁이 아니다. 창작물이 어떻게 소비되고, 누가 그 가치를 가져가는지에 대한 구조적 충돌이다.
판사는 'AI는 읽었을 뿐'이라고 했다
ChatGPT, Gemini, Claude 같은 AI 모델은 수억 권의 책, 학술 논문, 온라인 기사로 훈련됐다. 대부분의 저자는 자신의 작품이 AI 학습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지난해 William Alsup 판사는 Anthropic에 15억 달러(약 2조 800억 원) 규모의 저작권 합의를 승인했다. 언뜻 보면 저자 측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Alsup 판사는 Anthropic의 AI 학습 자체는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제재 이유는 학습 행위가 아니라 불법 온라인 섀도 라이브러리에서 책을 무단 복제한 것이었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썼다. "작가를 꿈꾸는 독자처럼, Anthropic의 LLM은 작품을 그대로 복제하거나 대체하기 위해 학습한 게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지식재산권·저작권 전문 변호사 Cathy Gellis는 이 판결이 AI 기업에 유리한 신호라고 본다. "저작권법은 복사에 달려 있지, 작품을 사용하거나 경험하거나 읽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15억 달러 벌금이 2028년 연매출 약 2,000억 달러(약 277조 원)를 전망받는 회사에 얼마나 의미 있겠느냐."

'공정 이용'이라는 안개 속에서
현행 미국 저작권법은 1976년에 마지막으로 개정됐다. 50년 전 기준으로 AI 산업의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JWL International의 IP·미디어 전문 변호사 Jason Henderson은 "AI 모델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학습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데, 법이 그 질문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핵심 쟁점은 '공정 이용(fair use)'이다. 저작권 보호를 받는 작품을 허가 없이 사용하더라도, 비평·패러디·교육 등 충분히 '변형적'인 목적이라면 합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법원은 사용 목적, 사용 분량,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따진다.
Henderson은 최근 판례의 흐름을 이렇게 요약한다. "네가 누군가의 자산으로 학습하는 목적이 직접 경쟁이라면 법원은 눈살을 찌푸린다. 경쟁하지 않는다면 법원은 허용하는 방향을 찾으려 한다."
그가 언급한 사건은 Thomson Reuters 대 Ross Intelligence 소송이다. 법률 리서치 회사 Ross Intelligence는 Thomson Reuters의 콘텐츠를 학습 데이터로 써서 경쟁 법률 플랫폼을 만들었다. Stephanos Bibas 판사는 "Ross의 사용은 Thomson Reuters와 다른 목적이나 성격이 없기 때문에 변형적이지 않다"고 판결했다. 직접 경쟁을 위한 학습은 공정 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일반 독자를 위한 챗봇이 저자와 직접 경쟁한다는 주장은 아직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Amazon은 책을 사들여 부수고 있다

법정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데이터 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404 Media는 희귀 고서 판매상과 협력해 책 안에 에어태그를 숨겼다. 그 책은 결국 라스베이거스의 Amazon AI 학습 시설 VGT3에 도착했다. 이 시설에서는 책의 등을 잘라 페이지를 스캔하고 책을 폐기하는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Amazon은 "고객이 사용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상업 채널을 통해 책을 구매한다"는 입장만 밝혔다. AI 학습 목적이라는 점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AI 기업들이 희귀본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인터넷에서 긁어올 수 있는 텍스트는 이미 소진됐다. 둘째, 2022년 이전에 출판된 책은 AI가 생성한 텍스트가 아니라는 보장이 된다. LLM이 AI 생성 텍스트를 과도하게 학습하면 출력 품질이 떨어지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Anthropic과 xAI는 희귀본이나 고서를 학습에 쓰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Amazon은 다르다. VGT3 직원들의 온라인 포럼 게시물에 따르면, 올해 초 스캔할 책이 바닥나 시설 폐쇄를 걱정하는 상황까지 갔다가 다시 희귀본 대량 구매로 재개됐다.
더 나아가, 404 Media의 조사는 AI 기업들이 ISBN 번호를 기준으로 책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는 판매상들의 오랜 의혹을 뒷받침했다. Amazon 직원들은 책을 스캔하기 전 바코드나 ISBN을 먼저 스캔하도록 훈련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쇄물을 ISBN 목록 순서대로 스캔하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에어태그를 심은 판매상은 404 Media에 이렇게 말했다. "희귀본의 가치는 역사적·지적·감정적 가치 등 다양한 것에서 나온다. AI 기업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단어를 이어붙인 내용물만 원할 뿐이다."

한국 창작 생태계가 마주한 질문
미국 법원의 판결이 한국 저작권 환경에 직접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글로벌 AI 기업들이 학습 데이터를 확보하는 방식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국내 출판·콘텐츠 업계는 한국어 데이터를 포함한 학습 데이터셋의 구성과 출처에 대해 AI 기업들이 충분한 투명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다.
공정 이용 기준의 모호성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변형적 사용'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AI 학습이 창작 시장을 잠식하는 '직접 경쟁'에 해당하는지는 아직 국내 판례가 쌓이지 않은 영역이다.
법은 아직 안개 속에 있다
대부분의 AI 기업은 여전히 소송 중이다. 지금 나온 판결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Gellis는 이렇게 정리한다. "초기 판결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다른 법원이 다른 결론을 내리면 그 영향도 뒤집힐 수 있다. 어느 쪽이 우세할지는 이후 소송 단계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 판결들은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다. AI 기업들이 이를 무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법이 50년 된 기준으로 AI 시대를 재단하는 동안, 라스베이거스의 창고에서는 오늘도 책의 등이 잘려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