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이전에 공개된 데이터만 써서 폐암 표적 항체-약물 접합체(ADC)를 설계한 AI 시스템이 있다. 수개월 뒤 머크가 동일한 설계를 독립적으로 도출해 FDA 혁신 신약 지정까지 받았다. 스탠퍼드대 제임스 조우(James Zou) 부교수 팀이 VB Transform 2026에서 공개한 '가상 바이오텍(Virtual Biotech)' 프로젝트의 결과다.

조우 팀이 처음 출발한 곳은 훨씬 작은 규모였다. 5~8개 에이전트로 구성된 '가상 연구실(Virtual Lab)'로, 자신의 스탠퍼드 물리 연구실 구조를 그대로 모방했다. AI 교수가 책임연구자(PI) 역할을 맡고, 전공이 다른 AI 학생들이 정기 그룹 미팅을 열었다. 이 시스템은 최근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에 결합하는 나노바디 단백질을 설계했고, 습식 실험 검증 결과 기존 인간 설계 나노바디보다 바이러스 결합력이 높았다.

이 성과를 확인한 팀은 규모를 전면 확장했다. 단일 연구팀 모방에서 대형 제약회사 전체 조직 구조로 넘어간 것이다. 완성된 가상 바이오텍은 최고과학책임자(CSO) 에이전트를 정점으로, 표적 발굴·분자 설계·임상시험 등 독립 사업부로 나뉜다. 표적 발굴 사업부 안에서도 유전체 데이터 전담, 단일세포 데이터 전담 에이전트가 분리돼 있다. 에이전트 총수는 3만 7,000개에 달한다.

왜 단일 모델이 아닌가

스탠퍼드, 3만 7,000개 AI 에이전트로 신약 설계…머크가 독립 검증했다 (summary)

모델 성능이 빠르게 오르는 시점에 굳이 수만 개 에이전트를 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우 팀은 같은 과학 과제를 단일 에이전트와 다중 에이전트 팀에 각각 풀게 하는 직접 비교 실험을 했다. 다중 에이전트 쪽에서 에이전트들은 서로 논쟁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고, 그 마찰이 오류 누적에 더 강한 해답을 만들어냈다. 조우는 "AI 과학자들이 토론하고 의견 충돌을 겪는 과정이, 단일 모델이 처음부터 혼자 문제를 푸는 것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견고한 추론을 끌어낸다"고 설명했다.

오케스트레이션의 병목 — Paperclip

수만 개 에이전트를 굴릴 때 진짜 병목은 지식 통합이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MCP를 씌우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레거시 시스템은 인간이나 사전 AI 알고리즘이 소비하도록 설계된 것이라, 에이전트 친화적 인터페이스가 없다. PDF 논문을 컨텍스트 창에 그대로 넣으면 복잡한 도표와 표를 표준 텍스트 모델이 제대로 읽지 못해 환각이 발생한다.

이를 풀기 위해 조우 팀이 만든 플랫폼이 Paperclip이다. 비정형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분산된 데이터베이스를 AI 전용 가상 파일 시스템으로 통합한다. 에이전트는 데이터베이스별 API를 직접 쿼리하는 대신, 수백만 편 논문의 지식을 파일 시스템 조작 방식으로 접근한다. 조우에 따르면 Paperclip을 쓰면 정확도가 높아지고, 이 AI 전용 과학 인프라 없이 에이전트를 쓰는 것보다 시간과 비용을 10배 이상 줄일 수 있다.

스탠퍼드, 3만 7,000개 AI 에이전트로 신약 설계…머크가 독립 검증했다 (summary)

3만 7,000개 임상시험 에이전트의 발견

가상 바이오텍은 3만 7,000개 '임상시험 에이전트'를 투입해 파편화된 임상 데이터를 종합했다. 이 에이전트들은 임상 성공 가능성을 예측하는 단일세포 특성을 발굴했다. 이 특성으로 뒷받침된 약물 표적은 그렇지 않은 약물보다 시장 출시 확률이 약 50% 높았다.

이어 시스템은 폐암 표적 CD276 단백질에 대한 ADC를 자율 설계했다. 2025년 1월 이전 공개 데이터만 활용했다. 수개월 뒤 머크가 동일한 치료 설계를 독립적으로 개발·검증했고, FDA 혁신 신약 지정을 받았다. 조우는 이를 "가상 바이오텍 에이전트가 제시한 치료 설계에 대한 제3자 외부 검증"이라고 규정했다.

워크플로가 아닌 환경을 설계한다

스탠퍼드, 3만 7,000개 AI 에이전트로 신약 설계…머크가 독립 검증했다 (keyword_summary)

다중 에이전트 시스템이 커질수록 관리 방식도 달라진다. 조우는 에이전트에게 단계별 지시를 내리는 워크플로 설계에서 벗어나, 에이전트가 개방형 문제를 협업으로 풀 수 있는 환경 설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크플로는 에이전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지 지시하는 방식이고, 환경은 인프라·가드레일·인센티브를 제공하되 나머지는 열어두는 방식이다.

개별 에이전트 성능 개선은 강화학습이나 지도 미세조정으로 할 수 있지만, 수만 개 규모 시스템의 성과는 협업 구조를 지배하는 환경 파라미터를 조정하는 데 달려 있다. 조우는 "다중 에이전트 차원에서는 개별 모델을 미세조정하는 게 아니라 환경 자체를 최적화한다. 환경이 곧 최적화 대상"이라고 말했다.

국내 바이오·제약 기업에 던지는 질문

이 실험이 국내 바이오·제약 업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구체적이다. 스탠퍼드 사례에서 핵심 병목은 모델 성능이 아니라 데이터 거버넌스였다. 레거시 데이터베이스를 에이전트 친화적 구조로 전환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력한 AI 모델을 붙여도 오케스트레이션 단계에서 막힌다. 국내 기업이 AI 파이프라인 도입을 검토할 때 인프라 재설계와 외부 검증 체계를 함께 설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