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금요일 오후, 미국 상무부는 앤스로픽에 공문 한 통을 보냈다. 내용은 간결했다.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앤스로픽의 최신 모델 '페이블 5'와 '미토스 5'에 접근할 수 없다. 근거로 든 건 '특정되지 않은 국가 안보 우려'였다.

앤스로픽은 공문에 구체적 사유가 없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모델의 가드레일 우회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공문 자체는 공개되지 않았다. 앤스로픽은 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두 모델을 모든 고객에게 전면 차단했다.

법원 승인도 없었다. 신속하고 일방적인 조치였다.

기술 문제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반박

보안 전문가 케이티 무수리스는 자신의 블로그에 앤스로픽으로부터 관련 연구 논문 사본을 받았다고 밝혔다. 해당 논문은 아마존 보안 연구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페이블 5의 가드레일 우회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논문 저자들이 아마존 소속이라고 보도했다.

무수리스는 논문에 묘사된 가드레일 우회가 수출 통제를 발동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핵심은 질문 방식의 차이다. AI에게 '코드의 보안 문제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이 코드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질문 형태가 다르지만 결과는 거의 같다. 이를 두고 수출 통제를 발동하는 건 기술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논문에 묘사된 행동은 의미 있는 방식으로 수정될 수 없고, 수정을 시도하면 오히려 방어 목적의 모델 성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무수리스는 썼다. 그는 이번 수출 통제 지침을 '성급하고 과도하며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수십 명의 보안 전문가들도 뒤이어 트럼프 행정부에 수출 통제 명령 철회를 촉구했다. 이들은 미국 네트워크 방어자들에게서 첨단 사이버보안 역량을 빼앗는 행위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정치적 배경이라는 시각

액시오스는 이번 지침이 기술 문제가 아니라 앤스로픽과 트럼프 행정부 사이의 '성격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3월 이미 앤스로픽을 '공급망 위험' 기업으로 분류한 바 있다.

아마존 최고경영자 앤디 재시가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앤스로픽 모델 관련 우려를 먼저 제기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것이 신중한 경고였는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테크 폴리시 프레스의 저스틴 헨드릭스는 이번 조치가 "미국 AI의 신뢰성에 대해 외국 정부들의 경계심을 높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AI 기업이 자국 정부의 개입 없이 운영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고위 관계자들이 개인적·정치적 요인에 따라 편을 가르는 의심의 분위기"라고 표현했다.

한국 사이버보안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이번 조치는 한국 AI 보안 연구자와 기업들에도 직접적인 신호다. 앤스로픽의 수출 통제 지침은 '미국인이 아닌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발동됐다. 페이블 5·미토스 5처럼 사이버보안 특화 기능을 가진 AI 모델을 클라우드 기반으로 활용하는 한국 보안 기업이나 연구자들은 유사한 조치가 재발할 경우 서비스 접근 자체가 차단될 수 있다.

미국산 AI 모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내 클라우드 보안 생태계 입장에서, 정치적 판단으로 AI 서비스가 하루아침에 차단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공급망 리스크로 읽힌다. 대체 모델 확보나 온프레미스 운용 전략을 검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선례가 됐다

이번 사태에서 미국 정부는 법원 개입 없이 민간 AI 기업의 제품을 강제로 오프라인 전환시켰다. 이 사실 자체가 핵심이다. 이번엔 앤스로픽이었지만, 다음엔 다른 기업이 될 수 있다.